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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는 향상 발전의 끝은 어디인가?

모든 물리적 현실은 우리의 '인식'으로 구성한 것입니다. 
 
옛날 중국의 한(漢)나라에 강궁(强弓)으로 소문난 이광(李廣)이라는 장군이 있었는데, 
어느 날 군사들을 거느리고 행군을 하던 중에 
전방의 고갯마루에 큰 호랑이 한 마리가 웅크리고 있는 것을 보고는 
군사들이 웅성거리며 동요 하는 사건이 벌어졌답니다. 

이에 평소 자신의 활 솜씨에 자신이 있던 이 장군이
선뜻 나서서 호랑이를 향해 힘껏 화살을 날렸는데, 
화살은 보기 좋게 호랑이에 명중했습니다. 

의기양양해서 화살을 맞은 호랑이에 다가가서 확인했더니, 이게 웬일입니까? 
그것은 호랑이가 아니라, 흡사 호랑이를 닮은 큼직한 바위였던 것입니다. 

화살은 그 바위를 보기 좋게 관통하여 꽂혀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에 이 장군은 자신의 강력한 활 솜씨에 더욱 우쭐해서, 
아까 활을 쏘았던 그 자리로 돌아가서 다시 바위를 향해 힘껏 활을 쏘았습니다. 

그러나 화살은 기대와는 달리, 바위를 꿰뚫지 못하고 튕겨나가고 말았습니다. 
재차 삼차 쏘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선문(禪門)에서 전해 내려오는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결국 사람이 그것을 호랑이로 보면 호랑이로, 바위로 보면 바위로 기능한 셈이니,··· 
「만법은 오직 마음으로 지은 것일 뿐이라」(萬法唯識)는 
'붓다'의 가르침을 드러내기에 알맞은 화두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20세기 초반에 들어서면서, 
이런 이야기는 더 이상 조금도 신기할 것이 없는 이야기가 되어버렸습니다. 

왜냐하면 당대 최고의 물리학자들이 
그러한 현상은 너무도 당연한 것임을 과학적으로 증명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직은 이런 사실이 일반 사람들의 상식으로 자리잡기엔 
상당한 시간이 더 소요되겠지만 말입니다.  
    
20세기 초반, 많은 물리학자들이 <빛의 성질>에 대한 여러 가지 실험을 시도한 끝에, 
기존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선택하는 실험방법에 따라서 <빛>이 전혀 다른 두 개의 성질 
즉, <입자(粒子)적 성질>과 
<파동(波動)적 성질> 모두를 띠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입니다. 

가령 간섭현상(干涉現象)을 일으키는 <쌍'슬릿' 실험>을 통하면 
<빛의 파동적 성질>이 증명되고, 
광전(光電)효과 를 통하면 <빛의 입자적 성질>이 입증되는 것이지요. 

이 실험결과로부터 1922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닐스 보어'(Niels Bohr, 덴마크, 1885∼1962)는 빛의
<파동­입자의 이중성>을 설명하기 위해 '상보성원리'(相補性原理)라는 이론을 발표하게 됩니다.  
     
즉, '파동'의 성질과 '입자'의 성질은 빛의 상호 배타적이면서 
동시에 상호 보완적인 측면들로 , 
비록 그 어느 한 쪽이 언제나 다른 한 쪽을 배척하지만, 
이 둘은 모두 빛을 이해하는 데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두 성질이 서로 배척하는 이유는, 
빛 또는 그 밖의 그 어떤 것도 동시에 파동이면서 입자일 수는 없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배타적인 두 성질이 어떻게 동일한 '빛'의 공동 성질일 수 있을까요?
여기에서 당대의 물리학자들은 전혀 새로운 사고의 전환점을 맞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것들이 '빛'의 고유의 성질이 아니라 
<빛과 인간(觀察者)과의 상호작용>의 성질 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어떤 실험방법을 선택하는 순간, 
다시 말해 우리의 의도가 정해지는 순간 
빛은 우리가 의도한 바대로 보여지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 둘 중의 어느 하나가 진정한 빛의 성질이냐고 묻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다시 정리해 본다면, 
빛은 스스로의 독립된 성질을 갖고 있지 않으며, 
앞장에서 밝힌 바와 같이, 
어떤 대상이 그 고유의 성질이 없다는 것은, 
그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또한 물리학자들이 밝힌 빛의 성질이 우리와의 상호작용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면, 
상호작용의 한쪽인 우리들 '인간'이 없으면 '빛'은 존재하지 않는다 는 
실로 놀라운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빛이 없거나, 또는 거기에서 유추하여 상호작용하는 다른 것이 없으면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상보성원리-  
     
그 동안의 고전물리학에서는 <이미 거기에 있는 어떤 대상>을 
사람이 여기에서 관찰함으로써 그 존재를 알 수 있었지만, 
현대물리학에 의하면 우리가 관찰하기 이전에는 그것은 거기에 있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관찰 대상이 각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재'가 아니라, 
단지 '상호관계'에 의해서만 존재한다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밝혀졌기 때문이지요. 

즉, 그것이 거기에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은 
오직 관찰자가 지어내는 '개념작용'을 따르는 것일 뿐,
관찰자가 '있다'고 하면 있고, '없다'고 하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2500년 전 '붓다'가 설파했던 <'만법유식'(萬法唯識)의 이치>를 
현대적인 표현으로 바꾸어 놓은 것으로서, 
결국 20세기 들어서 '붓다'의 가르침이 
최첨단 현대물리학에 의해 과학적으로도 입증된 것이지요.  
    
'붓다'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의 이 현실세계는 본질적으로 가상적이다.
즉, 산이나 물, 나무, 돌맹이, 사람 등과 같이 
'실재' 인 것처럼 보이는 모든 형체들은 사실은 
그 모두가 우리들의 '제한된 의식구조' 에서 빚어지는 순간적 환상인 것이다.
    
이제 이 장군이 그것을 바위로 본 이상 화살은 결코 그것을 뚫을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의 꽃 중에서- 
* * *
새 물리학은 '절대진리'가 아닌, '인간'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20세기 들어서면서 거시(巨視)세계를 다루던 기존의 고전 물리학이 
전자(電子)의 움직임 등을 기술하는데 그 한계를 드러내면서, 
그러한 미시(微視)세계의 운동을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법칙 
즉, 양자역학으로 대표되는 현대물리학이 탄생하게 됩니다. 

당시에 발표된 여러 이론 중에서도 
1927년 '하이젠베르그'(Werner Heisenberg, 1901∼1976)가 제시한 <불확정성 원리>와 
앞서 언급한 '닐스 보어'의 <상보성 원리>는 
그 동안 '객관적 실체'를 다루고 있는 것으로 믿어 왔던 
고전 물리학의 기본적인 틀을 그 근저로부터 뒤엎은, 
인류 문명의 혁명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 동안 고전물리학의 세계에서는 어떤 물체이건 간에 
그 <위치>와 <운동량(운동방향과 속도)>을 동시에 측정할 수 있었으므로 
그것의 존재성을 인정할 수 있었지만, 

모든 존재의 기본 단위라 할 수 있는 '양자'의 세계에서는 
위의 두 가지 사항을 절대로 동시에 측정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입니다. 

즉, 어떤 존재(양자)도 그에 대한 확정적인 기술(記述)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며, 
이는 다시 말해서 그 대상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도 없고,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도 없는 상황으로 되고 만 것입니다. 

이들 이론이 내포하고 있는 철학적 의미
(우리는 지금, 존재가, 존재 아닌, 세계를 살고 있다는 사실)가 
얼마나 충격적인 것인가를 과학자들 스스로가 얼마만큼 이해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은 분명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보다도 더 큰 "사건"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 이론이 발표된 지 근 한 세기가 다 되어 가지만 
그 이론에 따라서 세상을 보는 사람들은 거의 없어 보입니다. 
우리 인간이 그리도 신봉하는 
<과학>의 이름으로 명명백백하게 증명된 엄연한 사실인데도 말입니다. 
  
지동설이 보편적인 상식으로 자리잡는 데 수백년이 걸렸으니, 
최소한 그만큼의 시간을 더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요? 
대답은 회의적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수천년을 기다려 왔기 때문이지요. 

위의 이론들은 2500년 전 '붓다'의 가르침을 
20세기에 와서 과학적으로 증명한 것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일체의 운동 변화가 모두 사람들의 마음에 의하여 지어진
한갓 허망한 환상적 존재에 불과하다. -붓다-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 원리>는 간단히 말해서, 
전자의 <위치>를 보다 정확히 측정하면 할수록 
측정하는 순간의 <운동량(운동 방향과 속도)>은 그만큼 덜 정확히 파악되며, 
반대로 전자의 <운동량>을 더 정확히 측정하면 할수록, 
그 순간 전자의 <위치>는 그만큼 덜 정확히 관측된다 는 것입니다. 
즉, 측정행위 자체가 측정대상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지요. 

이 말은 결국 이 두 가지를 결코 동시에 관측할 수 없다는 것이며, 
나아가 이 두 가지 '물질의 속성' 가운데 
어느 한 쪽을 관찰할 것인가 하는 <선택적 결정>을 
바로 관찰자인 우리들 인간이 내려야 한다 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서 언급한 <빛의 파동-입자의 이중성>과 같은 맥락의 얘기로서, 
인간 스스로가 관찰해야 할 '물질의 속성'을 선택해야만 한다는 사실은, 
결국 그 '속성'을 바로 <인간 자신이 지어낸다> 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양자역학에 의하면 '객관적 관찰'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는 것이지요. 
우리들은 자기 자신을 관찰의 현장에서 결코 제외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연의 일부이고, 
우리들이 자연을 연구할 때, 
자연이 자연을 연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결코 회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

결국 현대물리학은 '절대진리'(絶對眞理)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 '인간' 스스로에게 바탕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즉, 인간은 인간 자신의 현실에 영향을 끼칠 뿐만 아니라,
어느 의미에서는 사실상 그 현실을 창조하고 있다 는
실로 놀라운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지요. 
 
만법은 오직 마음에서 생기고, 
만법은 마음을 따라 멸하나니,
이 모두가 오직 그대의 마음으로 말미암는다. -붓다-
   
2500년 전 '붓다' 이후, 많은 성인들이 한결같이 설파하였던 가르침, 
20세기 들어서는 과학적으로도 입증된 사실, 
하지만 왜 우리의 세상 보는 눈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 것일까요? 

이 세상에 무엇 하나 <실체>는 없으며, 
단지 거울에 비친 그림자와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심지어 그 그림자마저 우리가 이렇다면 이렇게, 저렇다면 저렇게 나타난다는 사실이 
과학적으로도 증명이 되었는데도 말입니다.

흔히들 이 세상이 갈수록 살기가 힘들어진다고 말합니다. 
당연한 현상입니다. 
인간 문명의 발전 속도는 점점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빨라지고,
빨라지면 빨라질수록 그 경쟁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한 우리의 몸부림은 처절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인류역사가 시작된 이래 계속 추구되어온 <향상, 발전>을 위한 모든 노력은 
이제 그 근원적인 차원에서마저 그 존재의 당위성이 부정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것만이 인류의 행복을 위한 유일한 대안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보다 안락한 삶, 
보다 안정된 삶, 
보다 풍족한 삶을 추구하여 마지않는, 
인간들의 그 탐욕스러운 노력이 계속되는 동안, 
다른 한편에서는 <인간성의 황폐화>만 더욱 가중되어 가고 있을 뿐, 
진정한 "평화"와 "안정"이라는 인류 공통의 목표는 점점 공허한 소리로만 들리기 때문입니다. 

목전의 현실을 실체로 알고 살아가는 한, 이런 현상은 더욱 가속화될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의 출구는 없습니다.
언제까지 진실을 등지고, 방황을 해야 하겠습니까? 
인간이 그토록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진실, 아니, 인정하기를 두려워했던 진실, 
이제 그 진실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만 할 때가 된 것입니다. 

<마음뿐인 도리>(唯心), 그 진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비로소 이 세상의 모든 흐름이 <우리의 마음>을 더 이상 괴롭히지 않게 되고, 
우리의 영혼은 비로소 참된 평화를 알게 될 것입니다. 

이 세간은 마음일 뿐,
다른 모든 법은 없는 것으로 보라
갖가지 일을 몸으로 짓는 것이 아니요
힘을 얻어서 자재햐야 비로소 이루어지느니라 -능가경 중에서- 
 
* * *
 
'법계'(法界)란, 보통 <만법을 두루 함용(含容)한 '우주'>라는 뜻으로 쓰이는 말이다. 
그런데 기신론(起信論)에 보면 
「'하나의 법계'란 곧 둘 없는 '한 마음'이다」 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 말은 곧, 이 <무변광대한 우주>가 
바로 우리 중생들의 <한 찰나 '한 생각'>에 매어 있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이것은 실로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만약 진실이 그렇다면 고전적인 물질관이나, 존재론적 세계관, 
즉 ― 고유의 특성을 갖고 '자체의 보존법칙'을 따르면서 
저 바깥에 엄연히 실재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이른바 '절대공간', '절대시간'에 대한, 문자 그대로 절대한 고정 관념은 
― 이미 현대물리학에 의해 반증된 바이지만 ― 완전히 설 땅을 잃게 되지 않겠는가? 
  
이미 '코페르니쿠스'적인 대전환도 경험한 바 있는 인류이기에, 
다른 모든 거창한 이론은 접어두고, 
― 「마음이 나면 온갖 법이 나고, 마음이 사라지면 온갖 법도 사라진다」 는 
이 지극히 단순하면서도 전혀 반론을 제기할 여지조차 없어 보이는, 
― 실은 이것 역시 '닐스 보어'의 상보성원리(相補性原理)에 의해 
이미 과학적으로 증명된 바이지만, 
― 때문에 이 말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사정이라면, 
사태는 급전직하로 반전되지 않겠는가? 
― 「이 삼천대천세계는, 중생의 정식(情識)으로 말미암아, 
중생의 마음속에 허망하게 나타난, '업의 그림자'(業影) 일 뿐이다」 
― 이 말은 '붓다'의 경이로운 '우주관'이 그 전모를 드러냄으로써, 
범부들의 깨달음의 성품에 새벽을 앞당긴, 실로 놀라운 언명이 아닐 수 없다. 

'하나의 법계'는 본래 텅 트인 허공과 같아서, 실로 티끌 하나 없이 말쑥하기만 한데, 
다만 중생의 망령된 사량 분별 때문에 <온갖 이런 것과 온갖 저런 것>, 
즉 하늘 땅 삼라만상과 일체의 유정 무정이 
<중생의 마음 속>에 그림자처럼 투영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주'의 실상이다. 
이 말은 다시 말해서, 천의 '중생'이 있으면 천의 '세계'가 있고, 
만의 '중생'이 있으면 만의 '세계'가 있다는 뜻이며, 
나아가 항하사 모래수만큼 많은 중생이 있으면 항하사 모래수만큼 많은 
'세계'가 있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 요컨대, 이 세계는 본래 정한 성품도 없고 정한 모양도 없는데, 
다만 중생들의 근기의 차이와 지은 바 업에 따라서 
순전히 중생의 업식(業識)으로 요술처럼 지어진 것이 
지금 면전에 펼쳐진 일체의 차별상인 것이며, 
이 티끌 수같이 많은 세계가, 마치 한 방 안에 백 개의 촛불이 있어도 
서로 간섭하는 일 없이 환히 비추듯이,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 바로 '우주의 실상'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제 마음'에 비친 '그림자'나 '메아리'와 같은 허망한 존재를 두고, 
저 바깥에 있는 <물질적인 '실체'>라는 망상을 지으면서 지금껏 살아왔으니, 
「중생의 마음이 철저히 뒤바뀌었다(顚倒)」는 말을 백 번 들어도 마땅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아직 <만법이 오직 마음뿐인 도리>나 
<마음이 그대로 '부처'인 도리>를 깨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서, 
또 설사 알았다 하더라도 아직은 사무쳐 체달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서, 
마치 굵은 가시 밤송이를
통째로 삼키는 일만큼이나 난감한 이 화두의 실마리를 차근차근 풀어보기로 하자. 
  
사실 '만법이 유식이니'(萬法唯識), '마음이 곧 부처니'(卽心卽佛) 하는 말을 
그저 한 토막의 지견으로만 알고 있는 사람들은 많다. 

그러나 이 말에 내재하는 엄청난 폭발성을 실감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이런 경우를 대할 때마다 절감하는 일이지만, 
이 '언어'가 그 훌륭한 순기능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이것이 '인간'과 '진실' 사이에 자취 없이 교묘히 끼여든, 
마치 절연체(絶緣體)와도 같은 구실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낭패감을 금할 수 없는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니다. 
때문에 초심자는 이 점을 특히 유의하여, 
결코 남의 '말'에 떨어져서 '진실'을 미혹하는 일이 있어선 안 될 것이다. 
 
우리는 이미 초보적인 연기설(緣起說)의 이치를 밝히는 과정에서, 
이 세상의 일체 존재는 낱낱으로는 '제 성품'이 없으며, 
이 모두가 다만 하나의 '참된 성품'(眞性)이 인연에 감응해서 
'나툰 바'(所顯)인 환(幻)과 같은 존재임을 알았다. 

이제 이 이치를 끝까지 밀고 나가면 어떻게 될까. 
― 이 세상에서 각기 독립적인 특성과 고유의 서로 다른 모양을 갖추고 있으면서, 
저마다의 고유의 규범을 따라 '제 갈 길'을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일체 존재가 
실은 티끌만한 예외도 없이, 
그 모두가 오직 '참된 하나'(眞一) , 곧 '한 마음'에 의지하면서 운용되고 있는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라는 사실을 곧 알게 될 것이다. 

여기에는 전혀 논리적 비약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일체 존재가 비록 허깨비 같은 존재이긴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참된 하나'를 머금었기 때문에, 
어느 것 하나도 '불사' 아님이 없고, '부처'가 아님이 없는 것이다.
마치 모든 '물결'이 그대로 '물'이 듯이 말이다.  
이것이 바로 일승법(一乘法)의 근거이다. 
 
따라서 이 '법계'의 온갖 사물은 겉으로 보기에는 비록 천태만상이지만 
이것들은 상호간에 밀접한 인과관계(因果關係)를 갖고 있으며, 
어느 것 하나도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은 없는 것이다., 일체만유가 모두 '한 법계', 즉 '둘 없는 한 마음'에 의지하여 있기 때문에, 
'중생'과 '부처', '번뇌'와 '보리', '생사'와 '열반' 등이 
서로 상대적이고 대립적인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이 모두가 오직 '한 법'의 서로 '다른 이름'이요, 
'한 법' 의 서로 다른 '모양'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번뇌'가 그대로 '보리'요, '생사'가 그대로 '열반'이어서, 
만유는 본래 원융무애(圓融無碍)한 '하나의 법계' 임을 밝히는 것이다. 
 
따라서 화엄경에서는 일즉일체(一卽一切)요, 일체즉일(一切卽一)이라 하여, 
'하나'가 그대로 '온갖 것'이요, '온갖 것'이 그대로 '하나'라고 했던 것이다. 

― 그런데 문제는 이와 같은 진실된 말씀이 없었던 게 아니고, 
따라서 웬만한 사람이면 다 이 말을 들은 적이 있었을 터인데, 
대개의 경우 그저 수박 겉핥기 식으로 그 명자(名字)만을 외었을 뿐, 
이 말이 갖는 오묘하고도 놀라운 뜻을 깨달아 살필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 이제 더 비켜갈 여지가 없다. 
― 지금 우리들 앞에 현존하는 모든 것, 그것이 유정이건 무정이건 간에 막론하고, 
그 모두가 각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고립된 '하나'가 아니요, 
바로 그것들이 '하나'인 채로 '우주 전체'와 더불어 그 '분량'과 '수명'이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그러므로 그 '하나'가 바로 '우주 전체'의 몫을 다 함용하는, 
즉 '하나의 사물'이 그대로 '전체 우주'인 것이다. 
거기엔 이미 '전체'와 '부분'의 구별도 없다. 
 
따라서 '하나의 미진'(微塵)이 그대로 '법계연기'의 근본을 이루며, 
이 '미진'이 바로 우주 성립의 '체'(體)요, '힘'인 동시에, 
되돌아 이 '하나의 미진'이 곧 '전체 우주'로 말미암아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주 만물은 각기 '하나'(一)와 '일체'(一切)가
서로 면면밀밀히 연관되어 있는 '겹겹이 다함 없는'(重重無盡) 관계이므로 
이것을 '법계의 다함 없는 연기'(法界無盡緣起)라 하는 것이다. 

― 이로부터 이른바 '화엄경'의 제호미라고 하는 
십현문(十玄門)과 육상무애(六相無碍)의 이치가 설해지기에 이른 것이다. 

이야말로 '연기설'의 극치로서, 
'우주 연기'의 주체를 어떤 '하나의 사물'이나, 
'진리의 본체'(理體)에만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의 사물, 나아가서 낱낱의 '미진'이 그대로 
'법계연기'의 주체가 된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미진'이나, '한 찰나의 한 생각'이나, 
이 모두가 그대로 '우주 연기'의 '주체'요, '근본'인 것이며, 
때문에 「우주 만유가 오직 그대의 한 찰나 한 생각에 달려 있다.」고 
설파하기에 이른 것이다. 

따라서 일체 만유는 모두 '나의 마음' 이 변해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이른바 '유심'(唯心)의 이치가 '법계연기'의 이치와 함께 
최상승의 법문으로 일컬어지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결국 학인의 공부가 오랜 세월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별 성과가 없는 까닭은 
바로 이 '하나의 법계', 
즉 '한 마음'을 깨치지 못했기 때문에 헛애만 쓸 뿐 성취가 없는 것이다. 

모든 법이 오직 '제 마음'이 변해서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마치 황금으로 만들어진 그릇은 비록 그 쓰임새나 생김새가 
서로 다르다 할지라도 오직 황금으로써 성품을 삼을 뿐, 
달리 다른 '성품'이 있을 수 없듯이 
― 천태만상의 모든 법은, 다만 '제 마음의 성품'을 보는 것일 뿐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법의 평등'을 깨달아서 '참된 지혜'가 활짝 드러나는 순간이며, 
만약 이렇게만 된다면, 다시는 이 
'번뇌하는 몸'을 제쳐두고 '열반의 저 언덕'을 희망하는 일도 없을 것이며, 
시비득실(是非得失)에 얽매어 허덕이는 
'중생의 마음'을 여의면서 '불도'(佛道)를 구하는 일도 영원히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진실되게 공부를 지어 가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알아야 한다.
― '미혹'과 '깨달음'은 이것이 '하나의 길'이요, 
'어리석음'과 '지혜'는 따로가 아닌 것이다. 

온갖 것이 오직 '제 마음'에 비추어진 허망한 '업의 그림자'(業影)일 뿐이라면,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르며, 
무엇이 '존재'이고 무엇이 '공'이겠는가? 

따라서 얻어도 얻은 바가 없고, 잃어도 잃은 바가 없음을 알 것이니, 
그러므로 '한 마음'을 분명히 깨치면 만법이 다 고요해진다고 한 것이다. 

이제 <모든 '인연'이 공함>과, 
<'불성'이 상주(常住)함>을 알았으므로 저절로 '말 길'이 끊어지고, 
'마음으로 헤아리고 더듬고 할 곳'도 사라져서, 
이에 마침내 훤칠하게 '법계 연기'를 깨쳤다. 

이제 모든 법은 몽땅 '하나의 법계'에 껴잡혀 있는 것이므로, 
다시는 '한 자리'에서 '한 자리'에 이르는 일은 없다. 

다시 말해서, 
'불각의 자리'(不覺)를 여의고 '정각(正覺)의 자리'에 이르는 것이 아니고, 
이것이 다 오직 본래 청정한 '한 마음'의 근원에 모일 뿐이다. 

그러므로 모든 '번뇌'와 '청정한 마음'은 다른 곳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다만 하나의 손바닥을 뒤집듯 할 따름이니, 모름지기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 * *
 

진리가 보편성을 근본으로 한다면 비보편적인 것은 진리가 아닌가?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지금껏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이야기해 왔습니다. 
또한, 수많은 경전과 철학서적을 하늘같이 신봉하며 
평생을 살아가는 수행자들도 무수히 많지요. 

하지만 그들을 비롯하여 우리 대부분이 간과해온 지극히 단순한 의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 우리는 왜 진리를 추구하는 것일까? "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야말로 
끊임없이 바깥에서 무언가를 구하려는 우리의 시각을 
자기 자신에게로 돌리는 시발점이자, 
진리의 실상을 밝힐 열쇠가 될 것입니다. 

위에 제시한 의문의 답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앞서 욕망의 실상을 밝히며 거론한 바와 같이 
그 해답은 바로 "욕망"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진리탐구에 대한 명분과 동기가 아무리 원대하고 심오하다해도 
그 답은 동일합니다. . . 욕망 때문이지요. 

"도탄에 빠진 인류를 구원하고 싶다", 
"혼란과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다", 
"영원하고 싶다" 등등. . .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결국 그것은 우리 자신의 "욕구"에 불과한 것입니다 . 

따라서 진리를 밖에서 추구하기보다는 
"왜 나는 진리를 추구하게 되었는가?"라는, 
자신 내면의 고찰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진리를 추구하게 되기까지의 동요와 혼란을 이해하여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 말은 결코 세속에서의 진리탐구가 불필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탐구의 대상이 밖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 이라는 것입니다. 

옛 성인들도 바로 이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됨을 늘 경책하셨던 것입니다.  

많은 수행자들이 탐욕이나 분노,
어리석음을 싫어하여 이것을 없애려고 하면서도
이(싫어하는 마음)을 모른다면 이것이 곧 미혹이다.
만약 한 생각 일어나는 순간 그 (일어나는 것)을 깨닫고는 이내
그 (일어난 곳)을 되돌아 비추되, 그것이 스스로(성품이 없음)을 보아서,
취하거나 버리거나 함이 없다면 곧 바른 안목이 밝아지리라. - 법화경 -
  
또 하나 우리가 고찰해야 할 점은 
" 과연 진리는 탐구될 수 있는 것일까? "라는 본질적인 문제입니다. 

진리는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기에 
인류 탄생 이래 지금까지 인간은 진리를 찾아왔겠지요. 

혹시 "'미지(未知)의 것'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첩보영화에서 접선할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접선이 이루어지는 경우를 보셨는지요? 
거기에는 최소한이나마 접선대상의 인상착의 등에 대한 정보가 제공됩니다. 

결국 우리도 "진리는 어떠어떠할 것이다"라는 
기왕의 경험이나 학습을 통해 얻어진 막연한 정보를 가지고 그것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마음속에 그려놓은 모양과 비슷한 것을 찾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것은 결코 "미지의 것"이 아닙니다. 

지극한 도(道, 진리) 깊고 넓으니
어찌 말로 드러낼 수 있으랴
입에 담으면 이미 '그것' 아니니
뉘라서 그것을 '있는 것'이라 하랴. -계침선사- 
  
참된 실재는 저쪽에서 찾아오는 것이지,
내가 그것을 찾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만약 내가 그것을 찾는다면 
이때, 나는 나 자신에 의해서 투영된 '기지(旣知)의 것'을 찾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미지의 것(眞理)'에 대한 '충동'이나 '탐구'는 결정적으로 끝나야 합니다.  
 
결국 우리가 처음에 제시한 제목 즉, "이것이 진리다" 
혹은 "보편적이지 않기 때문에 진리가 아니다"하는 논의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모든 '의식'은 
'기지의 것'의 지속적인 운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과거의 끈끈한 연결선상에서만 활동하는 우리의 의식, 
이것은 어쩔 수 없이 
그 의식을 통해 
그 작용과 활동, 그리고 욕구를 
완전히 전체적으로 이해했을 때에만 종식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지요. 
단순히 종교적 집회에 참가한다든가, 
강의를 듣는다든가, 
책을 읽는다든가 하는 것으로는 결코 이해될 수 없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당신은 사고의 전체적인 움직임을 그 어떤 비판이나 정당화함이 없이, 
한순간도 놓치지 말고 관찰하며, 
'적조'(寂照, 고요히 비춤. 止觀雙行) 해야 하는 것입니다. 

'무심'히 비추어 '작용을 잊으니'
만가지 근심걱정 모두 사라지고,
걸림없이 고요히 아니
온갖 현상이 스스로 거침없이 일어나네. -징관선사-
 
 
출처 : 현정선원 / 大愚禪師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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