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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말 인간 게놈 프로젝트(HGP, Human Genome Project)가 시작될 즈음 이 프로젝트가 마무리되는 2005년이면 인간 생명 현상의 비밀이 대부분 풀릴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최근 연구를 보면 생명 현상은 유전자뿐만 아니라 환경적 요인에도 영향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환경의 영향이 다시 자손에게 유전될 수 있다고 합니다. 이는 생명 현상이 인간 게놈 프로젝트에 참여한 연구자들의 기대만큼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생명 현상을 둘러싼 유전과 환경의 변주를 감상해 봅시다.
기획·편집 조동영 기자

[유전자와 환경의 상호 작용]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생물을 자기와 닮은 자손을 낳음으로써 생명의 연속성을 유지한다. 어버이가 지니고 있는 형질 하나하나가 자식에게 전달되는 과정에는 일정한 규칙성이 존재하며, 그 형질을 결정짓는 유전자의 비밀이 이제 하나씩 밝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세대를 거듭하면서 생물은 조금씩 변하고 있다. 오랜 세월 동안 생물은 환경에 적응하며 몸의 구조를 변화시키고 새로운 종을 형성하면서 진화의 과정을 겪어 왔다.
중학교 <과학3> (교학사)

 


환경·습관 따라 ‘유전자 발현’ 달라진다

생로병사의 모든 생명 현상은 30억쌍 디엔에이(DNA) 염기서열에 담긴 유전 정보 그대로 일어날까?

유전자결정론에 의문 제기하는 ‘후성유전학’

살면서 겪는 환경의 차이가 유전 정보를 다르게 발현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들이 나오고 있다. 이른바 ‘후성유전학’이 유전자 결정론에 의문을 제기하는 새로운 연구 분야로 성장 중이다. 후성유전학자들은 어떤 환경에서 사느냐, 무얼 먹느냐, 어떤 습관을 지니느냐에 따라 우리 몸의 디엔에이가 바뀌진 않더라도 그 유전 정보를 사용하는 방식은 바뀔 수 있다고 주장한다.
  ‘후성유전’ 개념은 1940년대에 처음 생겼지만 분자생물학에서 실증 연구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불과 4~5년 전. 김영준 연세대 교수(생화학·게놈연구소장)를 만나 이 분야의 연구 성과와 의미를 들어보았다. 김 교수는 “생명 현상과 개인 질병의 원인은 디엔에이 염기서열이라는 1차원 정보만으로 다 설명되지 않는다”며 “살면서 얻는 환경의 후천적 영향이 디엔에이와 유전자의 작동 ‘방식’을 바꾼다는 여러 증거들이 잇따라 발표되고 있다”고 말했다. 김 교수 연구팀도 지난해에 이어 이달 초 후성유전 물질이 유전자 발현을 조절한다는 사실을 밝혀 국제학술지 <네이처 지네틱스>에 발표했다.

후성유전 조절 물질로 ‘메틸기 분자’ 주목

똑같은 유전 정보라 해도 그 사용법을 바꾸는 후성유전 조절 물질로는 ‘메틸기’(-CH₃) 같은 생화학 물질들이 주목받고 있다. 지난 몇 년 새 이런 물질의 새로운 작용이 밝혀졌다.

메틸기는 디엔에이 같은 유전 정보 물질에 잘 달라붙는 흔한 분자다. 그런데 디엔에이 어디에 어떻게 달라붙느냐, 또 디엔에이를 실처럼 칭칭 감아두는 히스톤 단백질에 어떤 모양으로 달라붙느냐에 따라 메틸기가 붙은 유전자가 다르게 작동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환경과 음식, 생활습관에 따라 우리 몸에서 후성유전 물질의 쓰임새가 달라집니다. 그래서 어떤 유전자는 더 강하게 작동하고 어떤 유전자는 억제되지요. 놀라운 사실은 메틸기의 조절 패턴이 어떤 경우엔 후손한테도 ‘유전’된다는 점입니다.”

2차 세계대전 직후 잘 먹지 못해 키가 작은 세대의 다음 후손들이 풍족히 먹으며 자라도 성장이 더뎠다는 조사 결과는 후성유전의 사례 가운데 하나다. 그는 “하지만 메틸기가 어떻게 작용하는지 그 메커니즘은 아직 다 밝혀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후성유전학자들은 메틸기 같은 후성유전 물질이 우리 몸에서 사용할 유전자와 사용하지 않을 유전자를 구분해 주는 ‘표지’ 구실을 한다고 보고 있다. “사람 유전체(게놈)를, 3만 가지의 유전자 정보를 담은 3만개의 서랍들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닫힌 서랍에 든 유전자는 작동하지 못하겠죠. 열어 둬야 할 서랍, 반쯤 열어 둬야 할 서랍, 닫아 둬야 할 서랍을 구분하게 해 주는 ‘이름표’가 바로 메틸기 같은 물질입니다. 서랍 안의 유전 정보는 전혀 바꾸지 않아도 이름표만으로도 유전자 작동을 조절할 수 있게 되지요.” 그는 “유전 정보를 악보의 음표라 보면 후성유전 물질은 음표의 연주를 빠르게 또는 느리게 연주하라고 표시하는 수식어라 할 수 있다”고 비유했다. 무대와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는 연주법이다.

“생명 현상은 유전자와 환경의 복잡한 상호작용”

후성유전학의 눈으로 보면 암도 달리 보인다. “암은 흔히 유전자 돌연변이로 발병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최근 연구에선 암과 정상 세포를 비교해 보니 유전 정보 차이보다는 메틸기 같은 후성유전 물질의 차이가 더 두드러집니다. 유전 정보는 정상이라 해도, 환경 영향에 따라 달라진 메틸기의 조절 작용으로 암 세포가 생길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김 교수는 “결국에 생명 현상은 유전자와 환경의 복잡한 상호작용”이라고 말했다.

무엇보다 후성유전학은 유전자 결정론에 대한 도전으로 비쳐 주목받고 있다. 태어날 때 암 유전자를 지녔느냐 아니냐 하는 사실 못잖게 환경이나 음식, 습관도 질병 연구에서 중요함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후성유전학이 대체의학이나 환경주의가 옳다고 말하진 않지만 그런 주장에 어느 정도 과학적 근거가 있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인간 게놈 프로젝트(HGP)처럼 후성유전 물질(에피게놈)의 인체 지도를 작성하려는 국제 협력 연구도 추진되고 있다. 현재 미국·유럽연합·일본·오스트레일리아·캐나다와 한국 과학자들이 이 프로젝트 추진에 참여하고 있다.

오철우 기자, <한겨레> 2009-03-11, 기사

  읽기도우미

생명 현상을 이해하는 두 열쇳말, 유전과 환경

우리 몸은 ‘생명’을 유지하는 거대하고 복잡한 화학 공장과 같습니다. 이 ‘공장’의 운영 방식에 대해 오랫동안 과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있어왔습니다. ‘유전자’에 기록된 초기 설계도대로 ‘공장’이 운영된다고 주장하는 유전자 결정론자들이 있는 반면, ‘공장’을 둘러싼 ‘환경’에 따라 운영 방법이 바뀐다는 환경 결정론자들도 있습니다.

현재까지 연구된 바를 보면, ‘공장’은 ‘유전자’의 설계도대로 설계됐으나 운영 방식은 주변 환경에 따라 조금씩 달라질 수 있단 것입니다. 환경이 유전자 자체를 바꿀 순 없어도 유전자의 작동 방법엔 영향을 줄 수 있단 이야기입니다. 이는 부모로부터 암 유전자를 받았다고 해서 자식이 반드시 암에 걸리진 않는다는 것입니다. 생활 습관 개선 등 환경 변화를 통해 암 유전자가 발현되지 않도록 억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과학적 사실은 타고난 ‘운명’을 인간의 의지나 노력으로 바꿀 수 있다는 오래된 교훈을 연상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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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자 결정론 (gene selection)

생명체의 가장 근본적인 본질은 ‘유전자’라 생각하는 이론입니다. 유전자 결정론자들은 사랑과 우정, 예술가의 번뜩이는 창조력, 인간의 아름다운 고뇌도 모두 유전자로 설명할 수 있고, 비범한 재능과 수명, 건강까지도 유전자로 조작될 수 있다고 는 생각합니다.

1976년 영국의 생물학자이자 유전자 결정론자인 리처스 도킨스는 그의 책 <이기적인 유전자>에서 “우리들 인간, 그리고 다른 모든 생물들은 유전자에 의해 만들어진 기계”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우리(모든 종류의 생물)는 유전자라고 알려진 이기적인 분자들을 보존하도록 맹목적으로 프로그램된 로봇 전달자이자 생존 기계”에 불과하다고 말했습니다.


  자세히 알기 2

DNA와 유전자

1. DNA (DeoxyriboNucleic Acid)

‘디옥시리보핵산’이라고 부릅니다. 세포 핵의 염색체를 이루는 물질입니다. DNA는 생명체를 만들고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정보를 지니고 있습니다. 거의 모든 세포마다 대략 1.8m에 이르는 DNA를 갖고 있으며, 각 DNA는 23억 개의 유전 암호를 갖고 있습니다.

2. 유전자 (gene)

세포 핵의 염색체에서 일정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유전정보의 단위를 말합니다. 유전자는 DNA와 단백질로 구성돼 있습니다. 유전자의 주역할은 생명 현상과 직결돼 있는 단백질 합성을 지시하는 것입니다. 1989년 인간 염색체 내의 모든 유전정보를 밝혀내기 위한 인간 게놈 프로젝트(HGP, Human Genome Project) 연구 결과 인간의 유전자수는 약 3만5천개 정도라고 합니다.

 


성격도 유전이다?!

새해를 맞아 사람들이 남몰래 하는 결심 중 하나는 “성격 좀 바꿔야지”이다. 술ㆍ담배 끊고 운동하고, 일과 사람 관계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태도나 습관, 성격을 바꾸고 싶어한다. 하지만 곧 벽에 부딪친다. 타고난 성격이나 정신력 등을 바꾼다는 게 생각처럼 쉽지 않기 때문이다. 대체 무엇 때문에 이러한 기질은 바꾸기 힘든 것일까. 

40년간 다른 환경에서 자란 쌍둥이의 실례

1979년 어느 날, 미국의 한 신문에 ‘태어나자마자 각자 다른 가정으로 입양된 쌍둥이가 40년 만에 만났다’는 기사가 실렸다. 이를 읽은 미국의 토마스 부샤드는 심리학자로서 두 쌍둥이에게 매우 흥미를 느꼈다. 40년 동안이나 다른 환경에서 자랐다면, 두 쌍둥이는 과연 어떤 점이 비슷하고 또 어떤 점에 차이가 날까 하는 궁금증 때문이었다. 기사를 읽고 나서 가만히 앉아 있을 수만 없었던 부샤드는 두 쌍둥이의 유사성과 차이점을 조사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그 조사 결과에서 깜짝 놀랄 사실이 드러났다.

자란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당연히 다를 것이라고 생각했던 습관이나 취미 등이 두 쌍둥이에게서 똑같게 나타났다. 두 사람은 습관적으로 손톱을 물어뜯었고, 취미는 목공이었으며, 농구를 싫어하는 것도 같았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난 것일까. 믿을 수 없는 결과에 충격을 받은 부샤드는 이후의 다른 쌍둥이의 조사에서 성격이나 습관 등이 유전적 영향을 강하게 받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성격은 부모의 유전자에 의해 좌우된다”

유전자 결정론자들은 습관적인 거짓말이나 도벽도 아이 때 입은 정신적 충격의 결과라기보다는 대부분 유전적 소질 때문으로 보고 있다. 심지어는 사랑과 야망, 효도심, 창조성 등의 정신적 특성까지 부모의 유전자에 의해 좌우된다고 주장한다. 실제 과학적 연구 결과들은 개인의 성격이나 정신력, 습관에 미치는 유전적 영향력이 상당함을 보여준다.

캐나다의 토니 베논 박사는 같은 유전자 조합을 갖고 태어나는 219쌍의 쌍둥이를 대상으로 ‘인생에 대한 제어’ ‘책임감’ ‘자신감’ ‘새로운 도전 능력’ 등 네 가지 항목으로 구성된 48개의 질문을 통해 유전이나 환경이 강인한 정신력을 만드는 데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또 각기 다른 생활환경 속에서 이들의 성격과 습관이 어떻게 변해 가는지를 조사했다. 그 결과 환경보다는 유전이 더 많은 작용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유전적 요인이 52%, 환경적 요인이 48%의 영향을 미쳤다.

외향적 성격일수록 좌절 등을 겪은 뒤 재기하는 정신적 능력이 강한 것으로 나타났다. 예를 들면, 부모 모두 혹은 한 사람이 운동선수인 경우 자녀들은 모든 일에 승부욕과 도전의식이 강한 경우가 많았다. 강인한 정신력이나 성격 형성은 환경과 유전자의 복합적 상호작용의 산물이지만, 유전적 요인이 앞선다는 얘기다. 아마도 자식들을 키워보거나 아이들을 가르쳐본 사람이라면 기질이나 성격, 습관이 적절한 환경을 조성해 준다고 해서 얼마든지 바꿔나갈 수 있는 일이 아님을 인정할 것이다. 따라서 정신적으로 강한 자녀를 키우고 싶다면 배우자를 선택할 때 성격이나 의지도 중요하게 봐야 할 것이다.

유전자가 전등이라면, 환경은 스위치인 셈

…오랜 세월 학자들은 부모의 심리적 특징과 습관ㆍ정신력ㆍ성격 등이 환경이냐 유전이냐, 천성이냐 양육이냐를 놓고 논쟁을 벌여 왔다. 유전자의 판도라 상자가 열리기 시작하고 쌍둥이에 대해 광범위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이들 요소는 유전에 의한 영향이 더 큰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유전자는 인간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존재다. 물론 유전자가 한 인간을 100% 결정하지는 않는다. 또 특정 유전물질이 있다고 해서 곧바로 그런 특질이 발현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유전자에 내재되지 않은 특질이 인간에게 발현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의 게놈에 피부색을 검게 하는 유전자가 들어 있다 해도 환경적 요인 혹은 제 3의 다른 요인에 의해서 검은 정도가 차이를 보일 수 있다.

유전자는 잠재적 소질이다. 잠재적 소질은 그것이 타오를 수 있도록 불을 붙여 줄 때 능력 발휘가 가능하다. 그 유전자의 스위치를 켜 발현이 되게 하는 것이 곧 환경이다. 유전자가 전등이라면 환경은 스위치인 셈이다. 인간은 한편으로는 유전적인 소질에 의해, 또 다른 한편으로는 환경적인 요인에 의해 성장ㆍ발달하고 있다. 따라서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환경적 자극은 성숙한 인간이 되는 과정에서 꼭 필요한 영양분이다. 자신의 미래는 유전자뿐만 아니라 그 유전자를 끄집어내는 노력이 만드는 것임을 잊지 말자!

김형자 과학칼럼니스트, <KISTI의 과학향기> 2009-02-04,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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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체(genome)에서 단백질체(proteome)로

“유전체는 인체 부품 목록에 불과”

인간 게놈 연구의 권위자인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 에릭 랜더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유전체는 인체의 부품 목록에 불과하다. 유전체는 우리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가를 알려주기는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작동하는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려주지 못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체를 어떻게 움직이도록 만드는가에 대한 운전 지침서이다.”

2000년대 들어 ‘단백질체’ 연구 시작

최근 인간 유전체 연구가 일정 성과를 거두자 인간 단백질체(proteome) 연구가 2000년대 들어 각광받기 시작됐습니다. 단백질체란 생명 현상의 핵심 물질인 단백질들을 만들어내는 정보를 모은 목록입니다. 하나의 세포에는 언제나 수억 개의 단백질들이 바쁘게 활동하고 있는데 이 활동들의 실체를 규명하는 것입니다.

단백질은 구조가 복잡해 규명이 쉽지 않으며, 주변 환경에 따라서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화학적 변환을 일으키는 물질입니다. 과학잡지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을 보면 우리가 포도주 한 잔을 마시더라도 몸 속에 있는 단백질의 수와 종류가 바뀌게 된다고 합니다.


  낱말풀이

① 기질 (氣質) 기력과 체질을 아울러 이르는 말로 주변 자극에 대한 특정 유형의 정서적 반응을 가리킵니다. 낙천적인 기질, 반항아적인 기질 등으로 사용됩니다.

② 도벽 (盜癖) ‘도둑 도(盜)’에 ‘버릇 벽(癖)’입니다. 습관적으로 물건을 훔치는 버릇을 뜻합니다.

③ 발현 (發現) 속에 있는 것이 밖으로 드러나는 현상을 가리킵니다. 유전자는 주변 환경에 따라 발현되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대표적 실례로 인간은 꼬리를 만드는 유전자를 가지고 있지만, 발현되지 않고 있습니다.

 


“인간 사회는 생물적 진화가 아닌 문화적 진화에 의존해 변화”

인종ㆍ성별 따라 지능이 결정된다고?

지난해 5월 타계한 스티븐 제이 굴드(1941~1992)는 사회생물학의 창시자 에드워드 윌슨, <이기적 유전자>의 지은이 리처드 도킨스 같은 ‘적응주의 진화론’에 맞서 ‘문화적 진화론’을 설파한 진보적 생물학자였다. ‘찰스 다윈 이후 가장 유명한 생물학자’라고도 불린 그는 고생물학과 진화생물학 분야에서 뚜렷한 업적을 남긴 학자였지만, 그보다는 사회에 퍼진 생물학주의적 오해와 편견을 바로잡는 수많은 대중적 저작으로 더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생물학적 결정론의 오류와 오용 통렬히 비판

<인간에 대한 오해>는 빈곤이나 차별을 생물학적 결정론에 입각해 정당화하려는 시도들을 맹렬히 타격한 그의 저작 가운데 하나다. 81년에 초판이 나온 이 책은 생물학주의에 대한 경계심을 대중적으로 불러일으켰고, 96년 내용이 보완된 개정판이 나왔다. 한국어판은 이 개정판을 옮긴 것이다. 굴드가 개정판을 낸 것은 이 책에서 깊이 다룬 ‘지능’에 관한 생물학적 결정론의 새로운 변종을 논파하려는 목적에 따른 것이었다.

이 책에서 그가 다루는 것은 인간의 ‘지능’이 인종ㆍ계층ㆍ성별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유전적?생물학적으로 규명하려 했던 학자들의 역사적으로 유명한 작업들이다. 그는 이들이 연구방법으로 쓴 통계학이나 수량화가 지닌 방법적?실험적 오류를 철저히 파헤치는 방식으로 이들의 작업을 내파한다. 이를테면, 흑인이 백인보다 지능이 떨어진다는 가설 아래 두개골의 용량을 측정해 인종에 따라 용량에 차이가 난다는 걸 입증하려고 했던 유명 학자들의 노력이 기만과 편견에 찬 엉터리였음을 역사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지능지수(IQ) 테스트는 이 책이 다루는 또다른 사례다. 애초 정신 지체아를 가려내 따로 교육하려는 목적으로 프랑스의 심리학자 알프레드 비네가 개발한 이 측정방법은 미국으로 건너와 선천적으로 지능이 결정됨을 보여주는, 그리하여 인종을 지능지수에 따라 서열화하고 나아가 모든 사람을 그 지수에 근거해 한줄로 세우는 유전적 결정론으로 뒤바뀌었다. 그 사회적 결과는 ‘노둔자’로 분류된 밑바닥 계층과 외국인 이민자들을 미국 사회의 울타리 바깥으로 내쫓는 것이었다. 아이큐테스트가 인간의 정신능력을 총체적으로 설명하는 수단이 될 수 없음을 지은이는 수많은 역사적 자료와 통계를 통해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은 이 테스트의 창안자 비네의 생각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 속한 문화적 환경

굴드의 지적 투쟁은 한마디로 줄이면, 생물학적 결정론과의 싸움이다. 인간 사회는 생물학적 진화가 아니라 문화적 진화에 의존해 변화한다는 것이 그의 논지다. 그러니까, 인간 사회의 문화적 진화는 생물의 진화와는 달리, 라마르크적 방식으로, 다시 말해 획득형질의 유전에 따라 작동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유전이니 인종이니 하는 선천적 조건이 아니라 인간이 속한 문화적 환경인 셈이다.

고명섭 기자, <한겨레> 2003-07-11,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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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학적 결정론은 사회정치적인 것”

스티브 제이 굴드는 그의 책 <인간에 대한 오해>에서 생물학적 결정론이 자꾸 대두되는 까닭은 지배계급의 이익과 관련돼 있다고 지적합니다.

“생물학적 결정론이 되풀이해서 부상하는 까닭은 사회정치적인 것으로, 그리 멀리서 이유를 찾을 필요는 없다. 우선 사회적 프로그램에 대한 지출을 줄이려는 캠페인을 비롯해서, 사회적 비용을 절감하려는 정치적인 에피소드, 축복받지 못한 그룹의 사람들이 심각한 사회적 불안을 야기하거나 권력을 위협하는 시기에 엘리트 지배층의 불안감이 고조되는 것과 관련이 있다. …당신이 살고 있는 고급주택지에서 불리한 처지에 있는 사람이 소수이고, 그들의 의견이 대변되지 않는다고 고민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들의 처지가 현실의 사회적 편견이나 그 부산물 때문이 아니라 능력이 낮고, 일반적으로 부도덕하며, 생물학적으로 타고난 것이라면 말이다.”

스티븐 제이 굴드, <인간에 대한 오해>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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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평가 받는 라마르크 학설

살면서 생기는 환경의 영향이 몸에 남아 후손에게 유전될 수 있음을 연구하는 후성유전학은 과학이 아니라는 판정을 받아 버려지다시피 한 19세기 라마르크(그림) 학설이 허무맹랑한 얘기가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라마르크 진화설 = 획득형질 유전설

19세기 라마르크 진화설은 흔히 ‘용불용설’과 ‘획득형질의 유전설’로 요약되는데, 그동안 찰스 다윈의 자연선택 이론에 가려 인정받지 못했다. 라마르크는 생물 개체에서 자주 쓰는 몸 부위는 발달하고 그다지 쓰지 않는 부위는 퇴화하며, 이런 형질이 후손에 게 유전되면서 진화가 이뤄진다는 학설을 내놓았다. 장대익 동덕여대 교수는 “사실 다윈도 <종의 기원>에서 라마르크 학설을 분명하게 거부하진 않았는데, 20세기 들어 신다윈주의에선 라마르크 학설을 과학으로 인정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다윈 진화론은 우연히 생긴 돌연변이들 가운데 환경에 적응하는 유전 형질이 살아남는 방식으로 생물이 진화한다는 자연선택 이론을 받아들이고 있다.

“환경의 영향도 유전될 수 있다”

하지만 21세기 후성유전학은 ‘메틸기’ 같은 생화학 물질이 환경 영향에 따라 유전자 작동 방식에 변화를 일으키고 유전될 수 있다는 가설을 내세워, 사실상 ‘획득 형질의 유전’을 받아들이고 있다. 김영준 연세대 교수는 “환경의 영향이 유전될 수 있음을 인정한다는 점에선 라마르크 학설이 틀렸다고 보기 힘들다”고 말했다.

오철우 기자, <한겨레> 2009-03-11, 기사

 


인간 본성 발전 프로젝트



‘문화적 진화’로 인류 문명 대약진


“몇만년 뒤 다른 은하계에서 지구로 와서 호미니드(hominid, 사람과의 동물)의 화석 기록을 검토하는 과학자가 있다고 하자. 그는 대규모의 나무와 돌 인공물을 남긴 호미니드가 지구를 점령한 지 불과 500만년 만에 새 종이 등장한 사실을 밝혀내기 위해 애쓸 것이다. 새 종은 화석 자동차, 제트엔진, 핵 폐기물, 컴퓨터, 플라스틱 파이프, 텔레비전 수상기 등의 층을 남겨놓았다. 이 과학자는, 호미니드 신종의 화석 뼈는 옛 종류의 것과 비슷했지만 사고 장치의 새로운 배선이 콜럼버스와 21세기의 시작 사이에 일어났을 것이라고 확실히 결론을 내릴 것이다.”

인류 문명은 지난 몇백년 사이에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다른 동물 세계에서 이런 격변이 일어났다면, 과학자들은 분명히 그 동물의 몸 또는 뇌 구조의 변화에서 원인을 찾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의 신체는 수만년 전 석기시대나 지금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도 인류 문명에서 대약진이 일어난 데는 문화적 진화가 주된 역할을 했다.

“생물 현상은 ‘문화’의 맥락에서만 의미가 있다”

본성 대 양육(Nature vs. Nurture)은 인간 행동을 설명하려는 현대 과학의 단골 주제다. 어느 쪽이 더 근본적인지는 경우에 따라 다르다. 유전질환에서는 타고난 유전자가 더 중요하지만, 패션의 변화에는 문화가 더 결정적이다. 수십년간의 논쟁 끝에 이제 극단적인 유전자 결정론과 환경(문화) 결정론은 모두 거부된다. 이는 현실적으로 문화가 더 중요함을 뜻한다. 유전자보다 문화가 훨씬 더 다양하고 가변적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들)>(이마고 펴냄)은 생물학의 대부분이 문화라는 정황에서 고려했을 때만 의미가 있으며, 우리 문화는 일반적으로 역사라는 진화 과정을 통해서 변화한다고 강조한다.

윤리는 집단생활을 하는 인간에게 필수적이며, 윤리를 발달시키는 능력 또한 생물학적 진화의 산물이다. 하지만 무엇이 윤리적인지에 대한 판단은 사회와 장소에 따라, 같은 사회 안에서도 본성의 차이에 따라 달라진다. 따라서 개개인의 행동의 결과를 예측할 능력, 공감을 위한 능력, 사회의 도덕적 기준들을 주관화하고 가치판단을 할 수 있는 능력,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누구에게나 요구된다. 이것이 바로 자유의지다.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라는 등의 일률적 규정은 이런 자유의지와 정면으로 모순된다. 인간 행동을 조건짓는 유전자-환경 상호작용 속에서 무엇이 중요한지를 판단하고 그 판단에 따라 욕망을 조절하는 것은 자유의지의 몫이다.

‘의식적 진화’를 위한 노력 절실

인간은 유전적·문화적 진화와 유전자-문화 공진화라는 장기간에 걸친 복잡한 과정의 산물이다. 게다가 진화 속도가 갈수록 빨라지고 있어 의식적 진화를 위한 노력이 더욱 중요해졌다. 인간은 이미 많은 부분에서 의식적 진화를 이뤘다. 민주적 통치, 개인의 자유, 인종 차별 반대, 종교적 관용, 여성과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의 권리 보호, 세계적 분쟁의 회피, 환경 보호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갈 길은 멀다. 개발하고 발전시켜야 할 ‘문화적 본성’이 그만큼 많다. 그래서 ‘인간의 본성’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들)’이다. 인간이 본성을 발전시키는 만큼 세상은 앞으로 나아간다.

김지석 논설위원, <한겨레> 2008-10-04,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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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본성(들)> (폴 에얼릭, 2008, 이마고)

세상에 흉악 범죄들이 기승을 부릴 때마다 흔히들 인간의 본성을 탓합니다. 우리 인간은 본성적으로 공격적이고 탐욕스럽고 이기적이고 잔인한 동물이며, 그러한 인간의 본성은 쉽사리 바뀌지 않는다고들 합니다.

인간 본성은 고정불변?

이러한 인간에 대한 체념에는 한 가지 가정이 깔려 있습니다. 즉 인간은 유전자 같은 것에 의해 결정되는 단일한 고정불변의 본성을 타고난다는 것입니다. ‘변하지 않는 하나의 인간 본성’이란 생각은 현대 유전학의 성과에 의해 더욱 강화되고 있습니다. 유전자가 우리의 본성을 결정한다는 이 단순명쾌한 논리에 힘입어 암 유전자에서 동성애 유전자, 범죄 유전자, 비만 유전자, 최근의 행복 유전자까지 과학자들의 요란한 발견 목록이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진화돼 왔고, 진화 중인 인간의 본성들

그러나 이 책은 변하지 않는 하나의 인간 본성이란 없다고 단언합니다. 저자는 제목에서도 강조되듯이 시종일관 인간의 본성이 아니라 ‘본성들(natures)’이라고 복수형을 씁니다. 실제로 우리의 본성(호모 사피엔스의 신념, 태도, 행동의 패턴)은 개인마다 사회마다 다릅니다. 오늘날 우리의 본성은 불과 몇십 년 전의 우리의 본성과는 많이 다릅니다. 실제로 인간 본성은 진화해왔으며, 그 자체가 진화의 산물입니다. 진화의 시계에 비추면 찰나에 불과한 수백만 년 동안, 나무 사이를 뛰어다니며 벌레를 잡아먹던 인간조상의 본성으로부터 우리는 사고와 언어, 도구와 문명을 발달시켰고 우리의 본성 역시 진화시켜온 것입니다.

출판사 서평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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